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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선유도 수난의 역사와 사라진 선유봉

선유도는 한강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으로, 그 역사와 변천 과정이 다양한 시대를 거치며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선유도는 섬이 아니었습니다. 선유봉이 있는 산(?)이죠. 이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조선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유도의 역사적 변화를 탐구해 보겠습니다.

조선 시대 선유도

조선 시대 선유도는 주로 농업과 어업이 이루어지는 평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선유도는 그 자체로 천혜의 자연 환경을 자랑했으며, 주변 지역 사람들에게 휴식과 양식을 제공하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선유도는 뛰어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서, 사람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소통하는 장소였습니다.

김정호 대동여지도 경조5부도에 선유봉이 보인다

양녕대군의 영복정

양녕대군이 선유도에 영복정(永福亭)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조선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된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양녕대군(영복대군, 1394년 - 1462년)은 조선의 태종과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초기에는 조선의 왕세자였으나 여러 정치적 사건과 개인적 성향 때문에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양녕대군은 정치적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보다 학문적이고 사색적인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영복정은 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사색과 학문에 몰두하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장소는 당시 유학자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사상을 닦고, 문학이나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데 영감을 주는 중요한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영복정의 이름은 세조가 지은 이름입니다. 세상에 영화롭게 백년에 복 받는다는 뜻의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라고 하였습니다. 신선이 유람한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경치가 빼어난 선유봉(仙遊峯)과 함께 이 일대의 경관은 일품인 곳입니다. 1925년 일제 강점기 대홍수로 대부분의 정자가 유실 또는 파괴되었다.

겸재 양화환도에 선유봉

허난설헌의 유선사(遊仙詞)

「봄 한철 한가롭게 옥진(신선)과 놀았는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 벌써 가을이라네.
무제는 오지 않고 꽃도 다 져버려
하늘에는 노을이 깔리고 달이 다락에 다가오네.」
(一春閑伴玉眞遊 倏忽星霜已報秋
武帝不來花落盡 滿天人烟月當樓)

허난설헌의 <유선사(遊仙詞)>란 연작시 87수 중 76번째 시입니다. 신선의 세계도 세월은 흐르며, 자연도 변화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세계인 이상 변화는 당연하죠.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산봉우리였던 선유봉(仙遊峰)이 세월이 흘러, 선유도(仙遊島)란 섬으로 바뀐 것인데 바로 지금의 영등포구 당산동 선유도가 이 곳입니다. 

일제시대 선유도

일제 강점기 동안 선유도는 크게 변화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선유도를 포함한 한강 일대를 산업화 및 군사 전략적 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유도의 자연 환경은 많이 훼손되었고, 섬의 원래 모습과 기능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 선유도와 주변 지역에는 강제 노동을 수행하는 조선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일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선유봉

20세기 선유도

한국 전쟁 이후, 선유도는 서울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선유도가 서울의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주요 공장 지대로 변모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선유도의 환경은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섬의 자연 생태계는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오늘날 선유도

21세기에 들어서며, 선유도는 놀라운 변화를 겪었습니다. 서울시는 선유도를 도시의 녹색 공간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선유도 공원이 2002년에 개장했습니다. 현재 선유도는 자연 생태계를 복원하고 시민들에게 휴식과 여가를 제공하는 도심 속의 오아시스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공원은 다양한 식물과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는 생태공원,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테마 정원, 그리고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공간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